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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 연대기 (미국 이야기)

미국 수도 워싱턴 D.C : 세계 정치의 중심지

by 좋은_친구 2023.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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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영어로는 Washington, D.C로 쓰이는데 정식 명칭은 컬럼비아구(영어: District of Columbia)이다. 명칭에서 느낄 수 있듯이 조지 워싱턴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이름을 가져왔다고 한다. 미국 어느 주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특별 행정 구역으로 국제적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 있는 세계 도시이며, 금융 센터로서도 중요성이 높다. 수도로서 기능하도록 설계된 계획도시다.

워싱턴 D.C의 탄생 과정

1790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인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프랑스의 피에르 샤를 랑팡을 초청하여 새 수도의 설계를 의뢰하였다. 현재 잘 정비한 시원한 거리는 피에르 랑팡의 설계를 골격으로 하여 이어받은 것이다. 컬럼비아 구역을 포괄하는 워싱턴 대도시권의 인구는 약 620만 명으로, 미국의 대도시권 가운데 6번째로 큰 규모이다.

워싱턴 D.C는 원래 컬럼비아 영역의 개별 지자체였으나, 1871년 의회법으로 도시와 영토를 컬럼비아 구역이라는 하나의 단위로 합병하였다. 워싱턴 D.C의 법적 명칭이 '컬럼비아 구역'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워싱턴이라는 명칭은 미국 독립 전쟁의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미합중국 헌법 제1조는 주와 다른 연방 구역을 규정할 이곳을 영속적인 국가 수도로 삼고 있다. 수많은 국가 기념물과 박물관과 더불어 미국 연방 정부의 3부의 중심 관청이 모두 이곳에 있다. 워싱턴 D.C에는 174개 대사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세계은행, 국제 통화 기금, 미주 기구, 아메리카 간 개발은행, 범아메리카 의료 기구의 본부가 있다. 무역 협회, 로비 단체, 직능 단체 등 여러 기관의 본부도 이곳에 있다.

워싱턴 기념탑(555피트, 약 169.3m)의 높이 이상으로 건축물을 건설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제한하고 있어, 뉴욕과는 달리 초고층 건물이 드물다. 백악관, 펜타곤, 연방 의사당 등 미국의 주요 정부 기관들이 소재해 있다.

워싱턴 D.C의 역사 

오늘날 세계 정치의 중심이지만, 처음부터 그러지는 못했다. 

1749년에 백인 정착민들은 원주민들이 거주하던 포토맥강 주변에 이 지역의 첫 번째 도시이며 버지니아 식민지가 된 알렉산드리아를 세웠다. 이 당시 미국은 수도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뉴욕, 필라델피아를 비롯하여 여러 도시가 수도의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이에 의회는 1783년 영구적인 미국의 수도를 설치할 것을 의결했지만, 주마다 자기주에 수도를 두고 싶어 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1790년, 재정 장관인 알렉산더의 노력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알렉산더는 미국의 수도는 어느 주에도 속하지 않는 땅에 설치하기로 제안하여 모든 주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리고 의회는 1790년 7월 9일, 포토맥강 강가에 미국의 수도 설립을 승인하는 거주법을 통과시켰다. 정확한 위치는 7월 16일 법안에 서명한 조지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결정하기로 했다. 이에 워싱턴은 1791년 포토맥강 강가의 땅을 수도 구역으로 정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연방정부가 임시수도였던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 DC로 옮긴 것은 1800년이다. 이때 도시 인구는 고작 8,000명에 불과했고 더군다나 1814년에 영국과의 전쟁에서 워싱턴 DC는 영국군에 의해 점령당했고 의사당과 백악관을 포함한 많은 정부청사가 불타버렸다. 

하지만, 독립과 함께 대부분의 시설이 복구되었고, 남북전쟁(1861-1865)을 거치면서 인구가 급증했다. 전쟁 중에 북군의 부대가 대거 주둔했고, 이때 많은 사람이 수도를 지키는 일을 도우려고 워싱턴 DC로 이주해 왔고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흑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전쟁이 끝날 때는 인구가 45만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남북 전쟁이 끝난 후 의회는 워싱턴DC의 도시개발을 위해 도시 정부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대통령이 임명한 행정관 세 사람에게 도시 운영을 맡기도록 법을 개정했다. 그래서 워싱턴 DC는 미국에서 유일하게도 도시를 운영할 대표를 시민이 투표로 뽑을 수 없는 도시가 되었다.

워싱턴 D.C는 4개 지구로 구획된 계획도시이다. 도시 계획은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라파예트 장군의 군사 공학자로 식민지에 최초로 도착한 프랑스 태생의 건축가, 공학자, 도시 계획가 피에르 샤를 랑팡이 주로 맡았다. 

1791년 새 수도 배치 계획을 의뢰받은 랑팡은 바로크식 도시 계획을 본보기로 삼아 사각형과 원형을 중심으로 넓은가로 뻗어나가 개방 공간과 탁 트인 경관을 보이는 방식을 구상했다. 하지만, 랑팡은 수도 건설을 감독하기 위해 워싱턴이 임명한 세 위원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1792년 3월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해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 후 도시 계획은 랑팡과 함께 도시 측량 작업을 했던 앤드루 엘리엇이 완성하였다. 엘리엇은 가로 형태 등 당초 계획에 수정을 가하기는 하였지만, 랑팡의 계획에 기초하고 있어 랑팡은 워싱턴시의 전체 설계를 맡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랑팡이 의도한 수도의 탁 트인 공원과 장대한 국가 기념물의 경관은 빈민가와 아무렇게나 들어선 건물 등으로 어지러워졌고, 12층짜리 아파트가 등장해 의사당과 높이 경쟁을 벌이게 됐다. 이에 의회는 건물 고도 제한법(Heights of Buildings Act)을 통과시켜 어느 건물도 의사당보다 높게 짓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리고 빈민가를 철거하고 새로운 공원 체제를 세우는 등 랑팡이 의도한 설계를 장대하게 완성해 나갔다. 

오늘날 워싱턴시는 건물 윤곽선(skyline)이 낮고 넓게 퍼진 모양새를 갖추어, 복잡하지 않고 낮고 편리한 건물들이 있는 "미국의 파리"가 되길 바라던 토머스 제퍼슨의 뜻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워싱턴 기념비(Washington Monument)는 구역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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