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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 연대기 (미국 이야기)

콜럼버스에서 독립까지 : 미국 식민지 시대의 주요 사건

by 좋은_친구 2023.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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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식민지 시대는 혁명 시대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이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 다른 열강들에게 식민 통치를 당하던 시기이다. 즉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바하마 제도에 도착한 1492년부터 미국 독립 전쟁의 결과로 영국과 파리조약을 맺은 1783년까지로 미국 형성과 미국 역사의 초기 단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기이다.

 

본격적인 식민지 건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 여왕의 후원을 받아 대서양 주변의 아시아를 발견하러 나섰지만, 1492년에 서인도 제도라는 예상치 않은 곳에 도달해 대항해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그 뒤를 이어 영국인 존 캐벗이 탐사한 북미 대륙의 동해안은 뉴잉글랜드 식민지로 변했고, 프랑스인 자크 카르티에가 세인트로렌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캐나다 식민지를 개척하는 등 서구인에 의한 남북 아메리카의 탐험과 개척, 인디언에 대한 영토 약탈과 학살이 시작되었다. 콜럼버스의 상륙을 기념하는 콜럼버스의 날은 인디언 학살의 상징일로 매년 미국에서 인디언들이 시위에 나서는 날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식민지로의 발전은 1607년 영국이 현재의 버지니아주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하면서 시작됐다. 영국이 건설한 제임스타운이 미국의 모태인 셈이지만, 식민지 활동으로 개발은 처음부터 다민족 국가가 될 운명을 예정하듯이 진행되었다. 뉴잉글랜드로 불리는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에는 영국인이, 루이지애나는 프랑스인이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개척하는 등 개발은 주로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뉴욕과 뉴저지에는 네덜란드가 뉴네덜란드를 델라웨어에는 스웨덴이 뉴스웨덴을, 플로리다에는 스페인이 누에바 에스파냐를 각각 구축하였다. 17세기 중반에 북아메리카 동부 지역이 현재의 미국 문화로 이어지는 서양 문화가 이식된 것이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청교도들이 지금의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건설한 식민지는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도 원주민들에게 아픈 역사가 서려 있다.

 

원주민의 아픈 역사 

16세기에 유럽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출현과 종교 개혁에 이어 종교 전쟁이 일어나면서 102명의 청교도들이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미국인들은 이들을 필그림 파더스(순례자)라고 부른다. 정착 초기에 이들이 살아남는 데에는 그야말로 운이 크게 작용했다. 어업과 농업 기술이 거의 없는 소상공인이 대부분인 이들은 낚싯대 하나 챙겨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황무지 개척 능력이 없었다. 그 결과 필그림 파더스들은 영국이 건설한 제임스타운의 전례를 밟기라도 하듯이 하나둘씩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12월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가 다시 영국으로 떠난 이듬해 4월에는 거의 절반인 54명만 살아남아 있었고, 그나마도 절반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인근에 거주하던 원주민 왐파노아그(Wampanoag)족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중에서도 유럽인들에게 두 번이나 납치당해 노예 생활을 하는 등 고생하다 돌아온 티스콴텀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두 번째 납치 이후 메이플라워호 도착 1년 전에 돌아온 티스콴텀만이 유일하게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착민들은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를 놀렸는지 '스콴토'라고 불렀다. 그리고 필그림 파더스들은 자신들을 도와준 왐파노아그인들의 호의에 감사는커녕 원주민들을 사탄의 종자라고 불렀다. 반면 '영어를 할 줄 아는 스콴토'는 자신들의 정착을 돕는 하느님의 사자였다. 정착민들의 계속되는 확장과 더불어 왐파노아그 부족의 영역에 침범하게 되고 결국 필립 왕 전쟁 때, 왐파노아그인들이 정착민들을 공격해서 양측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정착민들에 의해 왕파노아그족은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된 평화협정이 맺어진 지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거의 학살당해, 2010년을 기준으로 2756명 정도의 후손이 남아있다고 한다. 현대의 왐파노아그인들은 추수감사절을 '국가 애도의 날(National day of mourning)'로 부르며 과거 백인들의 침략적 역사에 대해 교육하고 항의하고 있다.

 

본국과의 갈등 시작

1628년에는 매사추세츠만 일대에 이주민들이 대거 흘러들어오게 되었고, 1629년에 메릴랜드에, 1634년에 뉴잉글랜드에는 만여명의 청교도들이 살게 되었다. 그리고 1610년대 말에서 미국 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오만명의 죄수들이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1614년부터 네덜란드 정착민들이 맨해튼섬의 뉴암스테르담 등 허드슨강 하구를 따라 정착했다. 이주해 온 절대다수의 인구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프랑스와 스위스의 위그노, 아프리카에서 노예로서 이주하거나 중남미 식민지에서 들어온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은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한 미드 애틀랜틱 지역, 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 한 남부 곳곳에 이주하여 미국의 역사가 태동했다.

 

1674, 영국-네덜란드 전쟁 이후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아메리카 영토를 영국에 할양했으며, 뉴네덜란드주는 뉴욕주로 개명되었다. 새 이주민 다수는 특히 남부로 몰렸는데, 이들은 계약 노동자들로, 1630~1680년 사이에 버지니아의 전체 이주민 가운데 약 2/3가 계약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남부 대지주들의 농장이나 잡일을 위해 고용되었다가 계약 후에 자유 시민이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담보 노동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1729년 북부와 남부의 경제·사회적인 갈등으로 캐롤라이나가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분리되고, 1732년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지아에 식민지가 설치되면서, 이후 미합중국을 이루게 될 영국의 식민지 13개 식민지가 모두 성립됐다. 이들 각 주는 대부분 남성 자유민이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지방 정부를 두었는데, 옛 영국인의 권리에 헌신하고 공화주의를 고무시킨 지방 자치의 관념이 발전하였다. 그리고 모든 주에서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합법화했다.

 

이처럼 계속된 식민 사업으로 미국 동부 13개 주의 기초가 되는 식민지들이 세워진 상황에서 여러 요인으로 인한 본국과의 불화가 생겨난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 재정 문제로 고민하는 영국이 치안 유지비를 식민지들에게 부담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사실 미국에 있던 밀수업자들은 영국의 무역 재정 적자를 악화시킨 하나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처음엔 관계 개선을 원하였을 뿐 독립을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1773년 차에 대한 과세를 결정한 홍차 조례가 제정되면서 일명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하면서 본격적인 독립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한편, 아메리카 식민지는 출산율이 높고 사망률이 낮으며, 여성을 포함한 이민자가 끊임없이 유입하여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당시 미국의 평균 수명은 영국의 평균수명보다 10세 이상 앞서 있엇다고 한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은 프랑스에게 캐나다를 빼앗았고,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제외한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1770년에 260만여 명으로 당시 영국의 1/3 수준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에 조세를 납부했으나, 영국 의회에 대표자를 두지 못했다. 1730년대와 1740년대의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부흥주의 운동으로 종교와 종교 자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한 이 운동으로 인해 미국 대학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종교의 자유와 과학의 탐구를 위해 적지 않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1636년에 하버드 대학교가, 이후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등 소위 아이비리그로 지칭되는 명문 사립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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